2014년 9월 30일 화요일

ripping logs #19

프린스란 이름을 처음 들었던 건
국민학교 고(?)학년생 즈음이었던 거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 나지 않는다

국내에 Purple Rain 앨범이 소개되었던 즈음인 거 같은데
뮤직 비디오 소개를 곁들인 코미디 프로그램인
쇼비디오 자키란 프로그램에서 뮤비를 보았던 것이
나에겐 처음이었던 거 같고
(시기적 의미가 아닌) 이와 맞물려 동네 중학생 형들이 꼬마들 모아 놓고
마이클 잭슨 춤자랑을 하면서
We Are The world 앨범 제작 시 Prince가 참여하지 않자
마이클 잭슨이 그 비사회참여적 태도에 일갈을 날리고자
싸대기를 날렸다는 영웅담을 흐뭇하게 들려 주던 것이
(그러나 사실이 아니죠 ^^ )
과거 내 프린스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오른 쪽 앨범이 The Hits/The B Sides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과 비슷하게
라디오에 자주 울려 퍼지던 국내 가요를 시작으로
록음악에 푹 빠졌던 사춘기 시절을 지나면서
국내의 프린스 인지도 만큼이나 내 관심은
그에게 좀처럼 향하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록과 메탈이 최고였던 시절에는
누가 뭐 좋다고 하던간에 내가 들어 보지 않았거나
관심 분야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것이 기본이었 다

여러 매체 및 몇몇 지인들이 프린스를 숭앙하는(?) 듯한 모습만
보면 저런 댄스 음아하는 사람이 뭐가 좋다는 무식한 비아냥만
되내였을 뿐이다

그러던 차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레니 크레비츠를 알게 되면서 였다
그의 데뷔 앨범에 실린 속지에 써있던
제2의 프린스란 문구가 나를 조금 자극했던 거 같다
프린스가 도데체 누구길래 이 멋진 뮤지션을 수식하는
그것도 한급수 위인 듯한 단어를 집어 넣어 설명을 할까

그 궁금함이 풀어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거 같다
인터넷을 통한 상거래가 가능해 지기전까지
프린스는 참으로 머나먼 뮤지션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호감을 같기에 참으로 힘든
외모와 스타일만큼이나 그의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같은 곳곳에 깔려 있는 성적 늬앙스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앨범 한장 나오기 힘든 나라에 태어난 점
굳이 설명 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그의 수 많은 앨범을 일일히 접하기 힘들 땐
그의 히트곡과 B-side 곡을 모아논 본 컴필 앨범이 딱인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정규 앨범에 실리지 않은 곡들이 구입 이유였지만
그의 잘알려진 히트곡들과 함께 실린 B-side 곡들은
별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히트곡 모음집을 참으로 싫어 하는 편이지만
이정도 퀄리티라면 고집을 피울 이유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 

2014년 8월 18일 월요일

ripping logs #18

두 양반이 함께 앨범을 낼 때만 하더라도
J.J. Cale이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지 생각 못했다



그의 앨범을 처음 들어 본 건 93년도로 기억한다
학교 근방 레코드점에서 라이센스로 발매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구경도 못하던 5앨범을 발견하고
공강시간을 때우기나 할 겸
친구 자취방으로 향했고 거기서 그 앨범을 듣다가
점심을 막 먹은 탓도 있었지만 잠에 빠져 들었고
오후 수업 전체였는지 일부였는지 까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수업까지 재껴 버렸던.........
그게 J.J. Cale과 첫 만남이었다

간혹 누군과와 음악 이야기를 나눌 때
에릭 클랩튼과 마크 노플러의 기타 스승이라면서
(어디선가 줏어 들은 그러나 맞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어 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정작 그의 음악을 내 취향으로 받아 들이기 까지
한 10년은 걸렸다 말하는 게 정직할지도 모르겠다

고인에겐 영면을
그리고 에릭 클랩튼에겐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2014년 6월 10일 화요일

ripping logs #17

......

지난 토요일 약 10년여를 알고 지내던 동생 하나가 세상을 떠났다
와이프와 딸아이를 남겨 둔채

내 평생 동안 알고 지낸 사람 중 가장 신체 건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앞으로 그 친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허망하다


3호선 버터플라이 - dreamtalk

3호선 버터플라이를 처음 접한 건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였다
극중 전경(이나영)이 연주하던 꿈꾸는 나비란 곡으로 기억한다

이나영이란 배우를 처음 본 건 MBC 드라마로 기억하는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의 재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였다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 때 이 나영을 처음 보고
대학 시절 좋아했던 여후배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 이야길 왜? -.- )

세상을 떠난 친구의 넋이 나간 와이프의 연락을 받고
대구로 향하던 길
대구에서 만난 다른 후배와 술한잔 하려고 영덕으로 향하던 길
그리고 집으로 돌아 오기 위해 좀 둘러 온 7번 국도
본작과 함께였다

한 동안 이 앨범은 나에게 레퀴엠으로 기억될 거 같다



2014년 5월 27일 화요일

ripping logs #16

내 음악 감상의 역사 -.- 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년대를 꼽아 보자면
90년대 특히 국내 씬도 그 중 하나라 생각된다
(앨범 수집 취미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점은 한국인이란 점이지만)

좀 더 압축해 보자면 입대한 해인 94년부터 제대한 해인 96년까지는
거의 암흑기였을 거 같다 뭐 이부분은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장정에
음악 듣기를 좋아하는 남성이었다면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니
딱히 억울할 것도 없다

어찌보면 군생활 전후의 시기보다는 어떤 씬에 관심이 있었냐하는
개인적인 문제를 괜히 특정 시기 핑계를 대려고 군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는 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내 시선이 국내에는 거의 돌아 가지 않았다는 점이
그 시기가 제일 안타까울 뿐이다



노이즈가든(Noisegarden): 1992-1999 (DELUXE REMASTERED EDITION)

97년 복학 후 학우들을 통해 접해 본 PC 통신이란 것을
하게 되었고

특히 학교에서 공용(?) 계정을 통해 PC 통신을 하던 환경에서
벗어나 98년 내 인생의 두 번째 PC를 구입하여 리포트도 집에서
쓰고 PC통신도 집에서 하게 되면서 유머 게시판 같은 곳을 벗어나
개인 취미에 걸맞는 음악 동호회 눈팅을 시작하며 그 이름을
접하기 시작했던 거 같다

그 당시 내 초점은 용돈이던 알바던 돈이 모이는 족족
타워, 파워 스테이션, 신나라, 뮤직랜드 등 지금은 거의 다 사라진
대형 오프 매장을 찾아 다니며 영미권 록 음악 앨범을 구입하는 거 였다
(목돈 좀 쥐었을 때 종로와 을지로를 잇는 동선을 짜 본 사람은
이해할 것 같다)

물론 노이즈가든에 대한 이야기는 음악 동호회 게시판
, 음악 잡지 등을 통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왠지 이 사운드가든 짝퉁스러운 이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즉 위시리스트는 차고 넘치는데 이 짝퉁이(죄송) 눈에 들어 올래야
올 수 없는 때로 기억 된다

그러던 차에 해체를 앞둔 시기로 기억을 하는데
수요 예술 무대에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접해 들었고
본방을 사수하겠다는 마음 보다는 방송 당일 날 특별한
약속이 없던 차에 방송을 시청하게 되었고
전파를 통해 흘러 나오던 너무나 조악한 사운드로 인해
관심은 거기서 끝났던 거 같다

이러던 나의 관심을 다시 잡아 끌게 만든 것은
몇 년전 지인이 한번 들어 보라고 추천했던 Lowdown 30이란 밴드였다
노이즈가든의 윤병주씨가 새로 만든 팀이란 지인의 소개를 들었을 때만 해도
여전히 차고 넘치는 위시리스트로 인해 과연 언제나 들어 보려나
했지만 학생 때에 비하면 좀 넉넉해진 주머니의 여유로 여유를
부려 본다는 심정으로 구입했던 Lowdown 30의 앨범 들은
아 ㅅㅂ 노이즈가든 왜 구입할 생각을 안 했을까하는
후회를 가져다 주었다

이 시점에 톤이니 사운드이니 하는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뭐 별 거 없음)
예전 인터뷰나 근래 재발매 앨범이 출시 되면서 나온 인터뷰
그리고 몇몇 팟캐스트를 통해 (재 발매 부클릿 앨범에서도)
윤병주씨의 개인적 불만 중 하나가 사람들이 노이즈가든
이야기를 할 때 곡 이야기나 연주 등의 이야기 보다는 기타 톤이니
사운드니 하는 이야기만 하는 걸 볼 때 많이 아쉬웠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 또한 많이 부끄럽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노이즈가든이나 Lowdown 30의 앨범을 접하면서
가장 놀랍고 좋았던 부분은 국내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기타 톤이나 사운드적인 측면이 제일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변을 달아 보자면
창작자의 입장 물론 이해가 가지만 국내 록팬들의 입장에선
외국 유명 록 앨범과 (과거)국내 록 앨범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수준 낮은 레코딩으로 인한 조악한 사운드 였다
(물론 개중에는 뛰어 났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 팬들은 그 조악한 사운드를 자체 증폭 시스템을 통하여(?)
(어떤 특별한 귀들을 가지고 계신지는 모르겠으나)
누구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연주력이다
한국의 누구 이런 식의 수사를 남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일반적 팬 기준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레코딩을
들을 시 오래 전부터 팬이 아닌 이상은 자연스럽게
귀를 띠게 마련이다

윤병주씨의 멘트 중 하나를 인용해 보자면 톤이니 사운드니
하는 것은 뮤지션의 기본이라 했는데
미천한 개인 경험으로는 그 기본을 자신의 연주와 적절히
매치 시키는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거 같다
토니 아이오미가 잉베이같은 기타 톤으로
블랙 사바스의 곡을 연주 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블랙 사바스는 현재의 역사에 남아 있을런지...........

물론 (지금 환경도 그닥이지만) 과거 록 음악을 하기에
열악한 환경 가요 제작에 맞추어져 있는 레코딩 인프라 속에서
어렵게 앨범 발표 했던 국내 록 밴드 모두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이렇게 뛰어난 사운드를 지닌
앨범을 감상하게 할 수 있었던 그리고 뛰어난 사운드가 기본이
되는 훌륭한 연주력을 접할 수 있게 했던 노이즈가든에
열광했던 게 아닌지 뭐 그렇다 -.-

솔직히 딱 까고 말해서
나처럼 악기 연주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연주 관련된
직접적 멘트보다는 서당개 마냥 그간 들어온 풍월에서
축적된 기호를 바탕으로 이게 좋네 마네를 결정하는 게 대다수일 거다
내가 듣기엔 이 밴드 연주 참 좋은데 나름 들은 티는 내야 겠으니
아 톤이 죽여 사운드 봐라
뭐 이렇게 들 넘어 가는 거 아닌지............

뮤지션이 아닌 이상이야
축적된 기호와 취향으로 가는 거 임 -.-;;

2014년 5월 19일 월요일

ripping logs #15

 금요일 저녁에 본 영화는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 중 간만에
소위 말하는 감동이란 것을 선사해 주었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 동안 보아 왔던 음악 영화는 특정 뮤지션 또는 장르가 주요 소재였던데 반해
대중에게 부각이 잘 되지 않는 백업 보컬리스트들(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에
관한 영화란 점이 특색인 영화 스타로 부터 스무 발자국(20 feet from stardom) 이다



이 영화에 더욱 더 관심이 쏠렸던 점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아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장르들이
꽃을 피웠던 60 ~ 70년대에 주로 활동한 백업 보컬리스트들을
다루었다는 점인데 개인적으로 소장한 앨범들에 누군지도 몰랐던
베일의 주인공(?) 들을 조금이나마 알 게 된 점은 작은 소득의 하나이다





1. O.S.T. - 20 Feet From Stardom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말은
재능은 슬픈 것이로구나 였다
그들을 실패자로 볼지 크던 작던 자신들의 영역에서
뒤 늦게라도 인정을 이끌어 낸 성공한 사람들인지는
영화를 본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의 결론은 앞서 말한 재능은 슬픈 것이로구나 라는 10자 뿐이었다

특히나 유명 할리우드 시리즈 중 하나인 리쎌 웨폰 시리즈에서
대니 글로버의 와이프 역으로 더욱 잘 알려졌을 거 같은 분이
(Darlene Love)
메인 보컬을 맡아 빌 위더스의 Leon On Me를 부루는 장면은
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로 활동의 실패 남의 대역으로 살아 가던 인생 등
우리네의 지표로는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그들의
삶이 영화 내내 서술되어 보여 졌는데 그들이
부르는 Leon On Me 라니......
비썩 마른 엉덩이를 가진 것들이 소울이라니
하면서 엉덩짝을 철썩 후려 칠 듯한
Darlene Love의 프라이드 넘치는 가창력은
참으로 역설적으로 슬펐다

2. Gate Flowers - 늙은 뱀(EP)

어느 순간 오디션 프로그램이 차고 넘쳐 식상한 이 시대에
게이트 플라워즈라는 밴드를 건진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 EP를 보는 순간
넘겨 집는 거 겠지만
이제 우리나라에서 밴드가 정규 앨범 한장을 낸다는 것은
쉬운 환경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비단 게이트 플라워즈 뿐만 아니라
근래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국내 밴드의 대다수의 신보들이
EP였던 거 같다
제발 그냥 기우이기를 바란다

퇴근 길에 한번 뿐이 못들어 봤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거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한 두번은 아니니)
개인적으론 정규 1집보다는 이번 앨범이 더욱 마음에 든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응원과 환경을 지속해 나가길 빈다

What A Wonderful World

루이 암스트롱을 모른다 하더라도
혹시나 What A wonderful World란 곡 제목을 모른다 하더라도
실제로 곡을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곡일 거라 생각한다
(모르겠다 최근 세대에겐)

열열한 재즈팬이 아니더라도 이 곡을 알고 있다면
곡이 나오는 순간 그 위치가 술집이라면 술 한모금 홀짝여 보지 않았을까
퇴근 버스 안 라디오였다면 지친 몸 쉬로 가는 길에 잠시 눈을 감고
음미해 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이 곡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경우는
굿 모닝 베트남이란 영화에 삽입된 장면이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하는 가사와
대치되는 베트남 전의 참혹한 장면들이 화면을 흐를 때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역설법을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곡자체로도 명곡이지만
그 곡이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다시 배운 순간 중 하나였다

최근 들어 사회 돌아 가는 걸 보니 문득 이 곡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굿 모닝 베트남이란 영화에 BGM으로 나오던
그 장면들이 떠올랐다 말하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지구 상에 공산주의(대 다수가 실상은 독재지만)가 남아 있는
국가도 한 손에 꼽는 시대에 (셀 나라가 몇이나 되는지)
되도 않는 종북논리를 펼치면 돈 몇푼과 권력욕에 선동질하는
사람들이나 (차라리 돈 받고 하는 놈들은 났다)
진짜 빨갱이가 득실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이 다 죽을 때까지 이 나라는 변할 수 없겠구나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특히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 또한)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날을 많이도 세웠다
그러나 잊지 말고 반성해야 한다
저런 정부와 대통령을 만들어 낸 우리 스스로에게 따끔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 죄없는 어린 학생들 그리고 은근히 소외된 다른 희생자들
무능한 정부 연기력 높이기에만 힘쓴 대통령 뿐만 아니라
그런 정부와 대통령을 만들어 낸 우리의 이기심을 질책해야 한다

야당이 정권 잡으면 우리 지역 땅값 떨어진다더라
야당이 정권 잡으면 법인세도 오르고 세금 폭탄 맞는다더라
(니들이 걱정할 세금이 아니다)
무상 급식하면 부자 애들한테까지 밥을 줘야 하는데
그게 말이 되냐 (왜 안 되냐? 그애 부모가 세금을 더 많이 내는데)
여당이 정권 잡으면 부자들 세금 낮춰 준다더라
여당이 정권 잡으면 노인들 몇 십만원 씩 준다더라
기타 등등....
어짜피 선거란 것이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따져 보고
지지하는 것은 맞다
그리고 야당이 다 맞고 여당은 다 틀렸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요새 야당 하는 짓 보면 여당 새끼들 보다 더 미우니까)

한 때 그리고 지금도 우리 나라의 교육열은 세계 탑 클래스 중 하나이다
사실인지 우스개 소리인지 북미 이민자 사회에까지
학원문화가 열풍이란 뉴스도 언젠가 본 거 같다
(대다수가 좀 나 나은 생활하려고 좋은 환경에서 애들 키우려고
이민가서 잘하고 산다)
표현의 방법이 정상적이지 못해서 그렇지
다 자식 사랑하니까 부모들이 스팀팩 맞고 그런거라 이해한다
그 자식 사랑을 선거 때 좀 발휘했으면 어땠을까
내 자식이 어떤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지
내 자식이 어떤 세상에서 돈에 찌들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지
당장 내가 큰 이익을 남겨 자식에게 물려 줄 생각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 나라에서 자식이 평생 호위호식할 수 있는 부를
남겨 줄 부모가 몇이나 되겠냐 말이다

얼마 전 최저임금을 업종별로 차별화 하겠다는 뉴스를 봤다
한 숨만 나온다
소위 말하는 복지 선진국에선 계급을 없애려 부단히 노력을 하는 판에
이 나라에선 계급을 못 나눠서 안달인 것 같다
그리고 분명 얼씨구나 하는 사람들 나온다
당장 자신의 이익과 직결이 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이란 노동의 착취를 막고 최소한의 생활 안정을
보장하는 제도인데
이게 오늘 날에는 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의 이익 활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지표로 변질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현재 경기가 어려운 점 특히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과연 이게 최저임금이 턱 없이 높아서 그런 것일까?
수출만이 나라 경제를 성장 시킨다는 70년대 사고방식 때문이란 거
언제 쯤이면 깨닫게 될런지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남겨야 경제가 성장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이윤이 사회에서 얼마나
순환이 되는지는 생각지 못한다

제발 이 땅에 살면서
자기가 사는 동네 땅값 아파트값 오르기를 바라는
그리고 그거라도 좀 올라서 내 노후
또는 내 새끼 주고 싶은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정말로 돌아 오는지도 모르겠지만)이 나의 노후
또는 내 새끼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 좀 하고 살자
(니들 다 재벌이야?)


2014년 2월 6일 목요일

링크는 링크를 타고

 인터넷에서 무언갈 검색하다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

우연찬게 내 트윗 아이디를 발견하고 링크에 링크를 타고 나름 신기하다며
구경을 하다가 걸그룹 선정성 관련 기사까지 가게 되었다



이 새퀴들이 허락도 없이 인용하고 XX이여

2014년 2월 3일 월요일

ripping logs #14

 연휴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은 에릭 클랩튼의 라이브 앨범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라이브 앨범은 1975년에 발표한
E.C. Was Here, 1980년에 발표한 Just One Night 두장이다
(소장하고 있는 라이브 앨범 수가 미비한 관계로)

Eric Clapton - E.C. Was Here 

Eric Clapton - Just One Night





























































1997년 역사적이라 표현하는 에릭 클랩튼의 첫 내한공연 때는 복학했던 해였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복학 직후 학업보다는 술업에 더욱 매진하던 때였다
공연비는 고사하고 밥먹듯이 외상술을 먹던 때라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리던 시절 그러나 희안하게 지금보다 술은 더욱 풍족하게
먹기도 했던... 어찌 되었던 외국 뮤지션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은
사치와 같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두 번째 내한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때
첫 공연을 놓친 나로선 포기할 수 없었던 공연이었고
서둘러 예매도 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 공연을 보게 되었다

당시 기분은 그를 내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피부로
그와 밴드가 만들어 낸 음파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은 매우
감개무량한 것이었지만 가슴 한켠은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남아 있었다

내 기억으론 당시 에릭 클랩튼과 함께 기타 파트를 이루었던 멤버가
세션, 프로듀싱 및 자신의 음악활동 등 전방위적으로 활약하던
도일 브램홀 2세, (한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드러머 부치 트럭스의 조카이면서 10대 시절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멤버가
되기도 했던 각광받는 슬라이드 기타 연주가 뛰어난 데렉 트럭스였다
(현재 그는 역시 뮤지션인 9살 연상의 아내와 함께 밴드 활동 중)
에릭 클랩튼에 비해 적어도 한두(?) 연배 정도 차이가 나는
젊은 기타리스트들과 멤버를 이루다 보니 공연 자체는
활기가 넘치고 연주에서도 활력과 파워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 그 부분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거 같다

크림 시절보다 솔로 시절의 그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겉으로 확연히 들어 나는 연주들 보다 내면으로 사그라드는
평범한듯 하지만 미묘한 늬앙스를 전달해 주는 그의 기타 연주에
대한 기대가 더 컸던 탓이었던 거 같다

한 때 나의 블루스 교본과 같던 Double Trouble이 담겨 있는
Just One Night, 왠지 함량 미달인 듯한 라이브 앨범인 것 같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맛이 나는 E.C. Was Here는
세월과는 무관한 나의 애장 라이브 앨범들이다

2014년 1월 17일 금요일

ripping logs #13

어제던가 제프 벡의 2014.04.27 공연예매를 곧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이것 저것 찾아 보다가 문득 이승환이 떠 올랐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2010년이던가
국내 최초의 제프 벡 공연 성사에 있어서 그의 역할이 상당했었다는 후문
만약 이승환이란 뮤지션이 제프 벡을 전혀 몰랐거나(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제프 벡을 만나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컸다 생각한다

이승환에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그가 우리 대중 음악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하기 전에
제프 벡을 볼 수 있었던 그 점이 우선(?) 매우 고맙다


이승환 - Dreamizer
































앞에서 치고 지나갔던 잡담이 왠지 그의 그간 활동을 비아냥 거린 투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다
제프 벡 팬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이승환은 본인이 고1이던 때 1989년 데뷔 앨범의 출발부터
대박을 쳤던 90년대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음에 이견을 달 수 없을 거다

가요를 많이 듣던 시절이 아니어서 정확하진 않을지 모르겠지만
부활을 뛰쳐 나와 88년인가 솔로로 데뷔하여 큰 인기를 쌓아 가다
마약 사건으로 연루가 되어 잡혀가고 90년도 컴백했다가
(당시 불륜 유망주 육성을 위한 노래 같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진짜 지겨울 정도였다 -.- 메탈 키드 시절이라....)
재범으로 -.- 다시 잡혀 가지 않았다면 90년대 초반은 이승철, 이승환, 신승훈의
트로이카 체제가 만들어 졌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91년 서태지와 아이들 출현으로 인해 이승철이 건재했다해도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 나진 않았겠지만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젊은 층을 씹어 먹는 시대였다 하더라도
(물론 나도 당시 20대긴 하지만 AC/DC의 Back In Black 리프를
차용했던 곡 외에는 별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승환, 신승훈의 팬층은 매우 굳건하여 앨범을 내면 몇 십만장
팔아 먹는 건 일도 아니긴 했다

어찌 되었던 이승환은 분명 우리 대중 음악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은 분명하지만 그의 활동 기간 동안 음악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행사 했는지는 솔직히 미지수이다(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러나 당시 앨범 작업 시 사운드 질적 향상을 그 만큼 신경 쓴
뮤지션은 찾아 보기 힘들다
이 부분에서 서태지를 언급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승환을 더 쳐주고 싶다

그리고 하나 더 언급해 보자면 바로 공연이다
지금은 공연하면 많은 사람들이 김장훈을 떠 올릴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의 공연을 직접 본적은 없어 이런 말이 좀 우습기도 하지만
발표했던 라이브 앨범이나 공연의 몇몇 클립만 보아도
라이브형 가수라 인정할 만 하다
간혹 가창력이 도마 위에 오르곤 했지만 그 유명했던
프레디 머큐리도 공연 내내 완벽하진 못했다 (물론 이 분도 비디오만 -.-)

잡설이 너무 길어 졌는데
제프 벡 때문에 이승환이 잠시 떠 올랐다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 같다

본 앨범에 대해 짧막하게 하고 넘어 가자면
그의 커리어 중 10집에 해당하는 앨범으로 9집 발표하고 더 이상 앨범을
내지 않겠다는 현 음악 시장에 대한 토로를 깨고 발표했던
앨범으로 전형적인 이승환의 앨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사운드에 대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본작의 수록 곡 중 Dear Son이란 낭만 꼰대 송이 하나 있다 -.-
개인적으로 본작에서 가장 좋아 곡인데
사춘기 쯤 접어든 아들을 앉혀 두고 막걸리 한 사발 거나해진
아버지가 약해진 자신을 가리고 위해 점잔게 폼 좀 잡고 할 만한
70, 80년대스러운 대사를 가지고 있는 곡이다
이런 방화같은 신파를 이승환이 하면 맛이 난다
이 곡은 왜 내가 이승환을 좋아 하는 지 간적접으로 설명을 해주는듯 하다

뭐 그렇다 -.-